[맘스커리어 = 김혜원 엄마기자] 교사와 공모해 학교 시험지를 빼돌린 엄마에게 아들이 오히려 화를 내는 장면. 드라마 ‘일타스캔들’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성적만을 좇는 엄마에게 정직하게 살고 싶은 아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현실에선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교육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실제 현실에서는 시험지를 받은 학생이 죄책감보다는 성적 상승에 기뻐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경북 안동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시험지 유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전직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학교 행정실장이 공모해 기말고사 시험지를 여러 차례 유출했고, 그 대가로 수천만 원이 오갔다. 이들의 범행은 단발성에 그치지 않았다. 무려 2년 반 동안 총 10차례에 걸쳐, 중간·기말고사마다 시험지가 유출됐다. 그 덕분에 학부모 A씨의 딸은 줄곧 전교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경찰은 A씨와 전직 담임교사 B씨, 행정실장 C씨를 구속 송치했고, A씨의 딸도 불구속 송치됐다.
시험지 유출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2018년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교무부장 교사가 자신의 쌍둥이 자녀에게 시험지를 빼돌려 두 학생 모두 전교 1등을 만들었다. 법원은 해당 교사에게 징역 3년을, 자녀들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사건 이후 시간이 흘렀지만, 유사한 사례는 계속되고 있다. 2022년 광주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교사 컴퓨터를 해킹해 시험지와 답안을 유출했고, 울진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새벽에 교무실에 무단 침입해 시험지를 훔치려다 CCTV에 찍혀 자퇴하기도 했다.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기엔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성적 지상주의와 제도적 허점이 만든 구조적 문제다. 매번 충격은 크지만, 이내 잊히고 만다.
시험지 유출은 국내를 넘어 국제 시험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지난 5월, 미국 대학입학시험인 ACT와 AP 시험 문제가 한국에서 유출됐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일부 AP 시험 문제는 시험 전에 온라인에서 100달러에 거래됐고, 실제 출제된 문제와 일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일부 강사는 해당 문제를 특강 형태로 학생들에게 전달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논란이 확산된 뒤 경찰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했다.
그렇다면 성적을 조작하려는 이 같은 ‘시험지 도둑질’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적발될 경우, 시험지를 유출한 이들은 구속되고 학생은 성적이 0점 처리되며 퇴학 조치를 받는다. 형사처벌 전력은 평생 따라다닌다. 자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저지른 범죄는 결국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공정성을 훼손하는 이런 사례에 대해 학부모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한 학부모는 “조작으로 의대에 들어간들 버티지 못할 것”이라며 “그런 식으로 1등을 해봐야 자기 실력이 아니기에 결국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는 “이번엔 운 좋게 적발했지만, 음지에선 여전히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며 “이번 안동 사건은 학교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시험지 유출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성적 지상주의에 물든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좋은 성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제2의 숙명여고 사건, 제3의 안동고 사건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험지 관리 시스템의 철저한 보완이 시급하다. 안동 사건 역시, 학교 측이 전직 교사의 지문 정보를 삭제하지 않아 침입이 가능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허점을 막기 위해선 외부인의 접근을 원천 차단할 수 있는 보안 체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적 보완만으로는 부족하다. 시험지 유출이 ‘운 나쁘면 걸리는 일’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부모의 역할도 중요하다. 자녀에게 “정직하게 노력한 결과가 진짜 실력”이라는 가치를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을 이끄는 힘, 즉 자신이 만들어 낸 주도성과 회복탄력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려줘야 한다.
누군가의 부정으로 인해 다른 이의 노력을 짓밟혀진다면, 공정한 교육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당연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가 응답해야 할 때다.
맘스커리어 / 김혜원 엄마기자 hwkim@momscare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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