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스커리어 = 김혜원 엄마기자] 맘스커리어는 지난 15일 임신부와 배우자 80여 명을 대상으로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국내 첫 ‘안보태교 클래스’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천안함 피격사건 15주기와 서해수호의 날 10주년을 맞아 마련됐으며 맘스커리어와 사단법인 326호국보훈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K클래스가 주관, 해군 제2함대사령부와 더블하트·한국산후조리원연합회·럽맘·바이오모아메디칼·베이비박스·참약사 등이 후원했다. 안보태교 클래스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임신부와 배우자 80여 명이 평택에 모였다. 전 천안함장이자 현재는 326호국보훈연구소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최원일 예비역 해군 대령이 안내를 맡았으며 참여자들은 5개 해전사가 전시된 서해수호관과 천안함 선체·천안함기념관·서울함 등을 견학하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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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국내 첫 안보태교 클래스가 개최됐다.[사진=김혜원 기자] |
서해수호관에선 최 소장으로부터 북방한계선(NLL) 설정 배경과 제1·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최 소장은 “모든 국가 간 분쟁은 식량 때문에 비롯된다”라며 “알이 꽉 찬 암꽃게는 4~6월에, 살이 많은 수꽃게는 9~11월에 많이 잡히는데 어획량이 많은 이 시기에 NLL에 남북의 어선이 몰려 월선에 따른 단속이 심하다. 북한 어선은 인민군 부역선이다 보니 의도적인 도발을 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6월에 연평도 해상에 두 차례에 걸친 해전이 있었다”라며 “다음 달부터 2함대는 긴장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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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자들이 최원일 326호국보훈연구소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사진=김혜원 기자] |
정전협정 당시, 한반도 해역에서 남북 간의 무력충돌을 예방하고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NLL을 설정했다. 북한은 열세한 해군력을 가졌기에 20년간 NLL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해군력을 보강하여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일으켰다. 당시 2함대 함정은 기습공격에 맞서 배 6척을 격침 및 대파했다. 최 소장은 “경상자는 있었지만 우리는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었다”라며 “대패한 북한은 대파된 배를 수리하고 당시 생존 장병과 제1연평해전에서 살아남은 갑판장을 함장으로 진급시킨 뒤 다시 우리나라 경비정을 기습했는데 바로 제2연평해전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해전으로 우리는 6명이 전사했고 19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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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소장이 NLL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사진=김혜원 기자] |
최원일 소장은 “3월의 넷째 금요일인 21일은 서해 수호의 날인데 제1·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된 전사자 55분을 기리고 참전 장병을 격려하는 날”이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분들을 기억해 달라”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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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위령비[사진=김혜원 기자] |
참가자들은 천안함기념관으로 이동해 위령비 앞에서 참배했다. 최 소장은 전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나이와 가족 이야기를 들려줬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물을 훔치는 임신부도 눈에 띄었다. 천안함 선체에서 최 소장은 “천안함은 길이가 88m, 폭이 10m, 높이가 23m이며 톤수는 1200톤이다”라며 “당시 우리나라가 과학 기술이 뛰어나지 못해 선체는 국내 에서 제작하고 장비는 모두 외국에서 들여왔다”라고 말했다. 또한 최 소장은 “이 배가 왜 잠수함 탐지를 못 했느냐고 묻는데 당시 소나는 물밑에서 오로지 소리로밖에 잡지 못하고 9~13Khz 대역의 음파만 잡을 수 있었고, 이를 공격한 최신 어뢰는 저주파였다”라며 “예를 들면 KBS를 틀었으면 SBS를 못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런 한계점을 드러낼 수 없어 당시엔 언론에 발표하지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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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단된 천안함 앞에서 최 소장이 참석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사진=김혜원 기자] |
참가자들은 최 소장의 안내에 따라 기관조종실·승조원식당·침실·후타실 등을 둘러봤다. 유물 전시관엔 유가족이 기증한 훈장, 평소 사용한 물품과 군복 등이 전시돼 있었다. 최 소장은 천안함 피격 전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특히, 병장 다섯 명은 전역을 한 달 앞두고 제주도를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중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강원도 동해에서 온 전사자의 어머니는 결혼 5년 만에 얻은 외아들을 잃고 시신조차 찾지 못하자 밤마다 동해 바다에서 아들을 부르며 울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이미 폐암 말기여서 손 쓸 틈도 없이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전사자 가운데 결혼한 이도 많았고, 그들이 남긴 아이가 16명이었다. 당시 중2부터 두 달 된 갓난아이까지 있었는데 이젠 스물여덟 살과 중2가 됐다. 고 김태석 원사의 첫째 딸인 해나 양은 군 간부 장교후보생으로 교육에 들어가 곧 임관한다.
고 문규석 원사는 생전 어머니에게 ”군인은 계란 프라이를 좋아하는데 부대 앞에서 엄마가 장사하면서 그들에게 마음껏 주면 좋겠다“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머니는 이를 유언으로 여겨 평택에 식당을 차리고 군인이 올 적마다 계란 프라이를 듬뿍 구워 준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에서 온 많은 군인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다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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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사진=맘스커리어] |
최 소장은 ”다름 아닌 국민을 지키려고 목숨을 바쳤던 전사자와 생존 장병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라고 참가자들에게 당부했다.
맘스커리어 / 김혜원 엄마기자 hwkim@momscare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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